탄생 설화
강감찬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던 중 둔갑한 여우를 만나 강감찬을 낳았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강감찬이 태어났을 때 하늘에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낙성대라고 지명이 붙여졌으며 현재까지도 서울시 관악구에 낙성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정계 진출
강감찬은 36세 늦은 나이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무과가 아닌 문과라는 것이 흥미롭다. 1010년 요나라의 대군이 고려를 침공하였고 대세가 항복이었으나 강감찬은 몽진을 주장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후 강감찬은 문하시중까지 진출하고 함경도 쪽으로 파견되어 여진족을 대비하는 일도 맡게 된다. 거란의 3차 칩입 때는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각종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다다. 흥화진 전투에서는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다가올 때 물을 한 번에 흘러내리게 한 후 산골짜기에 매복한 기병들로 크게 승리하게 되고 후퇴하는 요나라군을 귀주에서 다른 부대와 연합하여 요나라 군사를 포위 및 섬멸시켜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귀주대첩은 우리나라 3대 대첩(살수 대첩, 한산대첩, 귀주대첩)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정계 은퇴
거란의 3차 침공을 막아낸 감강찬은 모든 자리를 내려놓는다. 그에 나이 74세였으며 건강 문제로 은퇴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종은 지팡이를 내어주며 사흘에 한 번만이라도 조회에 나오도록 하였다. 현종이 붕어하고 3개월 뒤, 8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묘소의 위치
강감찬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에서 발견되었다. 일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강감찬의 묘가 이곳에 있다고 얘기한다. 강감찬의 18대 손인 강빈은 끊이지 않는 독살설이 제기되고 있는 소현 세자의 세자빈이다. 강빈은 시아버지인 인조에 의해 생을 마감해야 했고 그 형제들도 큰 수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문종의 멸문지화를 피해기 위해 성씨를 바꾸어 생활하거나 조상에게 성묘하지 않아 그 무덤이 어떻게 전하여 오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일부의 주장일 수 있다. 실제로 승정원일기에 강감찬의 묘를 보수하라는 내용이 있고 선조 때는 강감찬의 묘 관리에 신경을 쓰라는 내용이 나온다. 아직까지도 이묘가 강감찬의 묘가 맞는지에 대한 의견은 엇갈려 있는 상태이다.
현재를 같이하는 강감찬
현재 관악구에는 강감찬의 시호인 '인헌'을 인용한 인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있으며 동네 마을버스 회사 이름도 인헌운수이다. 대한민국 무공훈장 중에는 인헌무공훈장이 있고 해군의 구축함 이름으로 강감찬 함이 있으며 낙성대 공원에서는 매년 강감찬 장군을 기리기 위해 축제를 열고 있다.